불이 꺼지지 않던 대학의 꿈, '묵애(默愛)'로 남다
- 등록일 : 2026.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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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 꺼지지 않던 대학의 꿈, '묵애(默愛)'로 남다
이정묵·이신애 교수 부부가 남긴 ‘자부심’이라는 유산
글|포스텍 대외협력팀
지도를 보고서야 찾아냈던 '허허벌판'에서
40년 전, 지도를 펼쳐놓고 '포항'이 어디에 붙어있는지부터 찾아야 했던 두 학자가 있었습니다. 미국 워싱턴에서 안정된 삶을 살던 이정묵, 이신애 교수 부부였습니다. 서울대학교에서 "그대로 몸만 오라"는 파격적인 제안을 뒤로하고, 그들은 아무것도 없던 영일만 벌판을 선택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김호길 초대 학장과 밤을 지새우며 나누었던 꿈, "우리 진짜 '대학다운 대학'을 만들어보자"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1986년 4월, 포항공대 교수 부임을 앞둔 이정묵, 이신애 박사 부부가 포항제철 헬기로 포항 영일대 착륙장에 내렸다.
연구중심대학의 기틀, 풍동(Wind Tunnel)에 쏟은 집념
이정묵 초대 부학장은 대학의 행정 체계를 세우는 동시에, 포스텍이 '연구중심대학'으로 우뚝 서기 위한 핵심 인프라 구축에 앞장섰습니다. 당시 국내 대학에서는 보기 드문 성능의 '아음속 풍동(Subsonic Wind Tunnel)'을 자체 설계하고 제작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대한기계학회 춘추학술대회 1991년 제1권 제2호에 게재된 ‘POSTECH 아음속풍동 제작 및 보정’ 자료 (1991년 1월)
그는 4,000여 권의 장서를 기증하여 대학의 지성을 채웠고, 직접 설계한 풍동을 통해 세계적 수준의 유체역학 연구가 포항에서 시작될 수 있도록 토대를 닦았습니다. 이 기틀 위에서 포스텍의 수많은 연구 성과가 싹을 틔울 수 있었습니다.
"학교와 결혼했다"는 각오로
이신애 교수는 당시를 회상하며 웃음 짓습니다. "학교하고 결혼했다고 할 정도로 관심이 많았어요. 그때는 일요일도 없었지. 교회만 갔다 오면 바로 학교로 갔으니까. 학교에 불 꺼진 날이 거의 없었어요."
남편 이정묵 교수가 대학의 뼈대를 만들고 연구 인프라를 구축할 때, 이신애 교수는 생명과학과 설립 멤버로 합류하여 연구의 기초를 일구었습니다. 부부에게 대학은 직장이 아니라, 함께 생을 던져 키워낸 자식과도 같았습니다.
묵애(默愛), 말이 필요 없는 깊은 사랑의 이름
대학을 향한 두 분의 깊은 애정은 이후 오랜 시간 '묵애'라는 이름으로 조용히 이어져 왔습니다. 시작은 2006년 이정묵 교수의 정년퇴임과 함께 부부가 5,000만 원으로 제정한 '묵애 장학금'이었습니다. 이정묵 교수가 먼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이신애 교수는 그 뜻을 이어 3억 5,000만 원의 기금을 보태며 그 사랑의 깊이를 더해왔습니다. '침묵 속의 깊은 사랑'이라는 그 이름처럼, 두 학자는 요란한 구호 대신 헌신과 나눔으로 대학에 대한 사랑을 표현해온 것입니다.

2006년 2월 이정묵 교수와 이신애 교수는 기계공학과·생명과학과 우수 학생 양성을 위한 ‘묵애 장학금’을 제정하기 위해 5천만원을 출연하고, ‘묵애 장학기금 협약 체결식’을 가졌다.
이제 한국에서의 삶을 정리하며 미국으로 떠나는 마지막 길목에서, 이신애 교수는 그동안 간직해온 마음을 대학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국제화 기금'으로 사용해달라며 대학에 또 한 번 큰 선물을 남겼습니다.
2026년 5월 1일 이신애 교수는 중진교수 특별연금을 기탁하며 묵애(默愛) POSTECH Frontier 장학기금 조성 및 사용 협약식을 가졌다.
기억으로 끝나면 되는 거예요
"우리가 닦아놓은 길이 다음 세대에게 밑천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기억해주는 것, 그 기억으로 끝나면 되는 거예요."
이신애 교수님이 남긴 이 담담한 한마디는 40년을 이어온 POSTECH의 자부심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말해줍니다. '대학다운 대학'을 향한 열망으로 불이 꺼지지 않았던 그 시절의 캠퍼스, 그리고 그 길을 묵묵히 지켜온 부부 학자의 발자취.
이제 POSTECH은 그들이 남긴 '말없는 사랑' 위에서 새로운 미래를 그려나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