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하나, 건물 하나에도 철학이 있었다
- 등록일 :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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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④ 이름 하나, 건물 하나에도 철학이 있었다
글|이광수
2017년 11월, 포항에 규모 5.4의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아파트 외벽이 무너지고 도심 곳곳에 균열이 생겼습니다. 대피령이 내려지고 수능이 연기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불안에 떨던 그 날, 포스텍 캠퍼스에서는 유리창 하나 깨지지 않았습니다.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대학이 세워지던 1980년대 중반, 내진설계 의무 기준조차 존재하지 않던 그 시절에, 박태준 설립이사장은 이미 이런 지시를 내려 두었습니다.
"모든 건물은 규모 6.0의 지진에도 버틸 수 있도록 설계하라."
천년을 내다보고 지어야 한다는 철학이, 40년 뒤 현실이 된 것입니다.
포스텍의 모든 것은 이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이름 하나, 건물 하나, 나무 한 그루도 허투루 결정된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정들은 언제나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과학기술의 미래를 위한 소수정예 연구중심대학. 그 치밀한 설계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도시의 이름을 걸고
대학의 이름을 정하는 일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선언입니다. 포항이공대학, 포항공업대학, 포항공과대학 등 여러 후보가 오르내리다 김호길 초대 학장의 의견에 따라 대학설립심의위원회는 '포항공과대학(Pohang Institute of Science and Technology)'로 최종 결정을 내렸습니다.
사립대학에 지역명을 사용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대개 지역 이름은 국공립대학에만 허용되었습니다. 그러나 포항에는 국립대학이 들어설 가능성이 없었고, 문교 당국은 이를 승인해 주었습니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가 작은 도시임에도 전 세계인의 입에 오르듯, 포스텍이 있어 세계가 포항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름 하나에 담긴 무게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1994년, 정부가 단과대학도 '대학교' 명칭을 쓸 수 있게 하면서 이름은 '포항공과대학교(Pohang University of Science and Technology)'로 바뀌었습니다.
건설공사가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때의 캠퍼스 전경
연구중심대학의 골격
1985년 4월 수립된 ‘학사기본계획’에 따르면 우선 공학계열 8개 학과를 먼저 개설하고, 수학·물리·화학 등 이학 분야 개설은 1991년 이후로 미뤄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1986년 1월, 뉴욕에서 열린 중진교수 간담회에서 이 내용을 발표했는데, 공학분야 중진교수들이 기초과학의 발전 없이는 응용과학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으므로 이학분야 학과의 조기 개설이 필요하다고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김호길 학장은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수학과·물리학과·화학과, 이학 3개 학과의 조기 개설이 결정되었고, 최종적으로 포항공과대학은 9개 학과 240명 정원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단기 성과보다 학문의 토대를 먼저 놓겠다는 결단이었습니다.
구분 | 학사기본계획 (1985년 4월) | 문교부 본인가 (1986년 11월) |
|---|---|---|
공학 | 금속공학과 (20명) 재료공학과 (20명) 기계공학과 (20명) 전기전자공학과 (20명) 계측제어공학과 (20명) 산업공학과 (20명) 화학공학과 (20명) | 금속재료공학과 (30명) 기계공학과 (30명) 전기전자공학과 (30명) 산업공학과 (30명) 화학공학과 (30명) 전자계산학과 (30명) |
이학 | 1991년 이후 개설 | 수학과 (20명) 물리학과 (20명) 화학과 (20명) |
합계 | 8개 학과 (160명) | 9개 학과 (240명) |
이후에도 같은 원칙은 이어졌습니다. 개교 후 김호길 학장은 생명과학과 신설을 추진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21세기에는 생명과학이 가장 유망한 분야입니다. 우리나라나 선진국이나 지금은 같은 출발선에 있습니다. 지금 시작하면 충분히 경쟁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2년의 준비 끝에 1989년 생명과학과가 문을 열었습니다. 국가 과학기술의 지형을 내다보고 학과를 설계했던 것, 그것이 포스텍이 처음부터 일반 공대와 달랐던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천년을 내다보다
박태준 설립이사장에게 건물이란 단순한 시설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포항제철소 공사 당시, 80%나 완공된 건물에서 하자가 발견되자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킨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타협하지 않는 품질, 원칙대로 짓는다는 신념은 포스텍 건설 현장에서도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이대공 건설본부장이 "유럽의 명문대학들은 수백 년 된 건물을 지금도 쓰고 있습니다"라고 하자, 설립이사장은“우리는 천년을 내다보고 지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선언을 넘어 설계 지침이 되었습니다. 내진설계 기준이 법으로 정해지기도 전에, 모든 건물이 규모 6.0의 지진을 버틸 수 있도록 시공되었습니다. 시공에 참여한 건설사들도 이 대학이 설립이사장의 필생의 사업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원칙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개교까지 지어진 건물은 모두 13채. 대학본관동, 교양학관, 제1공학관, 대강당, 도서관, 학생회관, 교수 아파트2개동, 기숙사 4개동, 파워플랜트. 그리고 개교식 12일 후에는 곧바로 2단계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박태준 설립이사장은 틈나는 대로 대학건설현장에 들러 공사진행 상황과 문제점 등을 파악하고 건설 관계자들을 독려하였다.
철학적인 설계로 만든 캠퍼스
포스텍 캠퍼스를 처음 찾는 사람들은 대개 통일감을 갖춘 건물을 보며 놀라워합니다. 캠퍼스의 모든 구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의 건물처럼 연결된 캠퍼스
대학본관, 공학관 5개동, 정보통신연구소, 수리과학관, 대강당, 무은재기념관, 학생회관. 각각 독립된 건물이지만 모두 '회랑'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지붕이 있는 긴 복도 형태의 이 회랑은 궁궐이나 불국사 같은 대형 사찰에서나 볼 법한 건축 양식입니다. 단순히 비를 피하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이공학 단과대학으로만 발전하겠다는 설립자의 철학을 공간에 새겨 넣은 것입니다.
7도의 경사와 인공개울
평지에 지어진 RIST와 달리 포스텍 캠퍼스 건물들은 7도의 경사각을 두고 배치되었습니다. 이 경사를 활용해 건물 회랑 안쪽에 인공개울을 만들었습니다. 칼텍 캠퍼스의 작은 연못들, 중동 건물 안의 습도 조절용 수로를 벤치마킹한 것입니다. 각진 건물의 딱딱함을 부드럽게 감싸는 물소리. 설계 하나에도 사람을 생각하는 배려가 담겨 있었습니다.
땅 속에 숨긴 시설들
캠퍼스 어디에도 전봇대가 없습니다. 효자주택단지와 학교 단지 전체가 마찬가지입니다. 전선, 케이블, 냉온수 배관, 가스관까지 모두 폭 6미터, 높이 4미터의 지하공동구 안에 있습니다. 설립이사장이 미국 엑손(EXXON) 연구소를 보고 직접 도입한 개념입니다. 덕분에 캠퍼스는 깔끔하고, 설비 관리는 편리해졌습니다. 이 시설은 완공 후 한동안 국내 대학과 기관들의 견학 코스가 되었습니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스마트 캠퍼스’의 효시였던 셈입니다.
한계를 뛰어넘는 집념으로 세계 수준의 인프라를 갖추다
건물이 올라가는 동안, 또 다른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연구장비를 채우는 일이었습니다.
1986년 여름, 캠퍼스 건물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포항제철의 해외 설비 공급사들이 먼저 손을 내밀었습니다. 설립이사장이 세우는 대학의 출범을 축하하며 고가의 첨단 연구장비를 기증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핵자기공명분석기, 화학전자분석기, 전자국부정량분석기 등 당시 국내 어느 대학에도 없던 장비들로 모두 21종, 금액으로는 700만 달러(약 63억 원)에 달했습니다. 국내 기업들도 7억 원 상당의 기자재와 장학금을 보탰습니다.
전산 시스템도 처음부터 세계 수준이었습니다. 개교 한 달 전, 연구용 VAX 8800과 학사용 IBM 4381이 설치되었습니다. 1986년 당시 선진국 연구중심대학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이 소식은 서울 주요 대학들에 큰 자극이 되었고, 언론은 "포항발 충격이 한국 대학교육을 각성시켰다"고 평가했습니다.

VAX8800과 IBM4381 컴퓨터로 구성된 중앙전산실의 모습
무엇보다 신설 대학이 마주한 가장 큰 벽은 ‘축적된 시간’의 부재였습니다. 특히 수십 년의 세월이 쌓여야 하는 학술 자료 확보는 넘기 힘든 산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포스텍은 이를 기회로 바꿨습니다. 1989년 미국의 대형 학술도서 유통사 U.S.B.E.(United States Book Exchange)가 도산 직전이라는 정보가 들어왔고, 도서관팀은 즉각 현지로 날아갔습니다. 그렇게 과월호 학술지들을 가득 담은 대형 컨테이너 2개 반이 포항으로 건너왔습니다. 구입 비용은 1억 원, 정상가로 환산하면 29억 원어치였습니다.
개교 2년 만에 포스텍 도서관은 국내에서 가장 많은 학술지를 보유한 곳이 되었습니다. 불가능해 보였던 학술 자산의 격차를 단숨에 극복해낸, 지극히 포스텍다운 정공법이었습니다.
모두의 진심으로 일궈낸 캠퍼스
1986년 12월, 개교를 목전에 둔 캠퍼스에 마지막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공사 일정이 한 달 단축되면서 가장 마지막에 이루어지는 조경 작업이 직격탄을 맞은 것입니다. 29종 3만여 그루의 나무를 심어야 했는데, 조경업체의 인력만으로는 개교식 전날까지 끝낼 수 없었습니다.
사정을 전해 들은 안병화 포항제철 사장이 즉시 직원 500명을 현장으로 보냈습니다. 그들은 밤을 새워 다음날 새벽까지 마무리 작업을 도왔습니다. 덕분에 말끔하게 단장된 캠퍼스에서 역사적인 개교식이 열릴 수 있었습니다.
교가도, 심볼마크도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서울대 음악대학 고(故) 이강숙 교수(훗날 한국예술종합학교 초대 총장)가 교가를 작곡했고, 한국 1세대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디자인계의 거목인 서울대 미술대학 고(故) 조영제 학장이 심볼마크를 다듬었습니다. 대학의 뜻에 공감한 이들이 기꺼이 손을 보탠 것입니다.
이름을 정하는 일에서부터 나무 한 그루를 심는 일까지. 포스텍은 처음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만든 작품이었습니다.

개교식에 맞춰 조경공사를 마무리하기 위해 포항제철 직원들이 밤을 세워가며 새벽까지 작업을 지원하여 개교식 행사를 무사히 치를 수 있었다. (1986년 12월 2일 심야)
40년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40년이 지났습니다. 개교 때 심었던 나무들은 땅속 깊이 뿌리를 내렸습니다. 지하공동구 위로 변함없이 아름다운 캠퍼스가 펼쳐집니다.
이 모든 것은 우연히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름 하나, 건물 하나, 나무 한 그루. 40년 전 그 선택 하나하나가 지금의 포스텍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정에는 언제나 같은 질문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 대학이 국가와 과학기술의 미래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가?
캠퍼스를 걸을 때, 한 번쯤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 회랑이, 이 개울이, 이 나무가 왜 여기 있는지를.
그 모든 풍경 속에 포스텍의 시작과 지향점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