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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보다는 사명으로: 그 진심에 응답한 선구자들

  • 등록일 : 2026.07.08
  • 조회수 : 231

신화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⑤ 조건보다는 사명으로: 그 진심에 응답한 선구자들



글|이광수



퇴계의 도산서원에는 왜 사람들이 모였는가


大海氷原萬里行 태평양을 건너 만리 얼음 벌판을 날아가

招賢事重屈身輕 어진 분 모시는 일은 중하고 내 몸 굽히는 건 가볍네

赤誠烈焰融鋼鐵 쇳덩어리마저 녹일 뜨거운 마음으로

相約三韓振學名 온 나라에 학교 이름 펼칠 것을 약속하였네


교수 초빙에 나선 김호길 학장이 창밖으로 광활한 빙원이 펼쳐진 비행기 안에서 쓴 시입니다. 석학을 모시는 일의 어려움과 각오, 그 여정의 무게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건물은 완성되어가고, 장비도 채워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학다운 대학을 만드는 마지막 열쇠는 따로 있었습니다. 좋은 교수를 채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좋은 의사가 있어야 좋은 병원이듯, 좋은 대학이란 좋은 교수가 많은 대학입니다. 도산서원이 퇴계 선생이 계셨기에 경향 각지에서 안동으로 유학을 왔지, 건물이나 풍광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김호길 학장이 평소 강조하던 말이었습니다. 그 신념이 그로 하여금 미국와 유럽을 넘나들며 뛰어난 학자들을 직접 만나 설득하도록 했습니다.


해외교수 초빙 행선도표



마음을 움직인 단호한 일갈


교수 초빙은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1차(1985년 9~10월)는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의 22개 대학을 직접 찾아가는 대규모 설명회였습니다. 설명회에 앞서 대상자들에게는 박태준 설립이사장 명의의 초대장과 대학 소개 브로슈어가 먼저 발송되었습니다. 국내 어느 대학도 해본 적 없는 격식 있는 초청이었습니다.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449명이 설명회장을 찾았고, 지역마다 30~40명이 참석하는 열기가 이어졌습니다. 설명회는 포항제철의 기록 영화 '고난과 시련 그리고 영광' 상영으로 시작해, 이대공 건설본부장의 '대학 설립 의지와 지원 계획', 김호길 학장의 '대학은 이렇게 운영됩니다' 순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포항제철이 하는 대학이라지만, 기존 기업 재단 대학들이 가졌던 고질적인 문제들을 똑같이 되풀이하는 건 아닌가요?" 참석자들의 의구심이 터져나왔습니다. 김호길 학장의 답은 단호했습니다.


"포항제철이 나라의 장래를 내다보고 그 이름을 걸고 만드는 대학입니다."


그리고 그 특유의 언변이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유학을 왔습니까, 이민을 왔습니까? 배운 지식을 조국에 환원하는 것은 지식인의 사명입니다. 이민 온 사람은 남고, 유학이 끝난 사람은 나와 함께 돌아갑시다."


"여러분의 목표가 교수라면 서울대나 과학기술대로 가십시오. 그러나 연구가 목적이라면 포항공대로 오십시오. 우리는 여러분의 길러진 두뇌를 최대한 발휘케 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일류 대학을 만드는 것, 이것이 마지막 기차입니다."


애국심에 호소하면서도 연구중심대학의 비전을 자신 있게 내세우는 그 열정과 화법에, 참석자들은 하나둘 마음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독일 아헨공대에서 열린 설명회에 참석한 과학자들이 김호길 학장의 설명을 경청하고 있다. (1985년 10월 8일)



조건보다 사명을 택한 ‘원팀’


"건물은 돈으로 지을 수 있지만, 두뇌는 돈으로 사올 수 없습니다."

박태준 설립이사장의 확신이었습니다. 우수한 교수진 확보야말로 대학의 성패를 가르는 관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지방 소재 신설 대학이라는 현실적 제약 앞에서 설립이사장은 파격적인 연봉을 보장하는 ‘학과별 석좌교수제’ 도입을 구상했습니다. 실력 있는 인재를 모시기 위한 현실적인 유인책이었습니다. 그러나 김호길 학장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특정 소수에게만 혜택을 주면 교수 간 위화감이 생겨 결속력이 깨집니다. 포항공대 교수라면 국가 과학기술 발전에 기여한다는 사명감과 긍지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이 일은 제게 맡겨 주십시오."


조건보다는 ‘원팀(One Team)’의 정신과 지식인의 사명을 강조한 김호길 학장의 승부수였습니다. 자청한 그의 어깨가 무거워졌지만, 결과는 설립이사장의 걱정을 말끔히 씻어낼 만큼 성공적이었습니다.


1차 초빙 활동을 마치고 귀국한 김호길 학장은 중진교수 10여 명의 부임 의사를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이정묵 박사(미 해군성 연구심의관), 김동한 박사(Wyeth Lab 선임연구원, 재미과학기술자협회 회장), 최상일 교수(노스캐롤라이나대), 변종화 교수(로웰대), 장수영 교수(뉴욕대) 등 각자의 자리에서 이미 정점에 선 석학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결단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포항이 한국의 어디쯤 있는지도 모르는 가족을 설득해야 했고, 미국 현지의 안정된 주택과 연금, 자녀 교육 혜택을 모두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돈으로 사올 수 없는 두뇌’들이 움직인 동력은 단 하나, 남은 생을 조국에 바치겠다는 뜨거운 마음, 그리고 박태준 설립이사장과 김호길 학장에 대한 굳건한 신뢰였습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기존 대학 사회는 충격에 빠졌습니다.  "그분들이 정말 포항공대로 가는 겁니까?"라는 질문에는 부러움이 담겨 있었습니다. 조건이 아닌 가치로 결합한 중진 학자들의 결단은, 포항공대가 세계 수준의 대학으로 나아가는 강력한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부임의사를 밝힌 해외 중진학자들을 부부동반으로 초청한 뉴욕 간담회 모습 (1986년 1월 11일)



재미과협, 든든한 우군이 되다


재미과학기술자협회(재미과협)는 1971년 설립되었습니다. 고국의 과학기술 발전에 기여하고, 해외에서 연구와 학업을 이어가는 동포를 돕기 위한 모임이었습니다. 김호길 학장이 앞장서 설립하고 초대 간사장을 맡았던 바로 그 단체였습니다.


재미과협은 포스텍 교수 초빙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설명회 장소 확보와 진행, 대상자에게 자료를 보내는 일을 자발적으로 떠맡았습니다. 그리고 임원 출신들이 대거 부임 의사를 밝혔습니다.


1986년 1월, 박태준 설립이사장은 중진교수 10명 부부를 뉴욕 파크레인 호텔로 초청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설립이사장은 자율적인 대학 운영과 교수 인선 보장, 제철학원의 지속적인 지원을 직접 약속했습니다.


조선일보 미주판은 '포항공대, 교포 중진학자 13명 스카우트'라는 제목으로 이 소식을 크게 보도했습니다. 주저하고 있던 젊은 과학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같이 국가 차원에서도 유치 대상으로 꼽혔던 비중 있는 과학자들이 조국으로 돌아와 포스텍을 만든 것입니다.



아헨의 밤을 울린 전화벨


1985년 10월 초, 독일 아헨의 한 호텔. 미국과 영국에서 교수 초빙 활동을 마치고 온 김호길 학장과 이대공 건설본부장이 다음날 예정된 아헨공대 설명회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습니다. 세계철강협회총회 참석차 런던에 와 있던 박태준 설립이사장의 전화였습니다.


"어때? 좋은 분들이 좀 올 것 같아?"

"아직은 두고 봐야 하겠습니다. 설명은 열심히 했습니다."

"주로 무슨 질문들이 많아?"

"근무조건이나 생활환경에 대해 많이 궁금해했지만… 회장님이 교수에게도 '쪼인트'를 까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하…… 그래, 뭐라고 대답했어?"

"학교 선생님에 대한 회장님의 평소 철학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20분 남짓 이어진 통화가 끝나자, 처음부터 곁에서 듣고 있던 김호길 학장이 말했습니다.


"That's it! 오늘 참 좋은 장면을 보았습니다. 포항제철 상무이사와 회장이 이 정도로 격의 없이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뒷날 김호길 학장은 이 통화를 두고 "포항공대가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이때 가졌다"고 술회했습니다. 두 가지에 크게 놀랐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설립이사장의 소탈한 인간적 면모였고, 또 하나는 포항제철의 유연한 조직 문화였습니다.



46인의 선구자들


세 차례의 초빙 활동이 마무리되었고, 모두 46명의 석학들이 입학식 전에 부임하였습니다.


1987년 3월, 1회 입학생 249명을 맞이할 준비가 갖춰졌습니다. 교수 전원 박사, 교수진 전원 조교수 이상의 전임교원, 교수1인당 학생 수 국내 최소 수준. 설립 과정에서 국가와 사회에 약속한 세 가지를 한 치의 오차 없이 지켰습니다.


박태준 설립이사장도 치하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교수진의 면면을 보면 알겠지만, 짧은 기간에 세계적인 석학들을 서울이 아닌 포항으로 유치한 것은 김호길 학장이 아니면 엄두조차 내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 46명은 각자의 자리에서 안정된 삶을 내려놓고 조국으로 돌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연구를 하기 위해, 그리고 대학다운 대학을 만들기 위해. 그들의 선택이 포스텍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제1회 입학식에 참석한 교수들. (1987년 3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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