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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기 입학생 249명이 오기까지: 한국 대학 역사의 이변

  • 등록일 : 2026.07.08
  • 조회수 : 98

신화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⑥ 1기 입학생 249명이 오기까지: 한국 대학 역사의 이변


글|이광수



대학 설립을 시작한 지 1년이 조금 지난 1986년 4월. 건물 공사와 교수 초빙은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최고의 밭을 일구고, 최고의 농부를 모셨습니다. 이제 마지막 한 가지가 남아 있었습니다.


씨앗. 이 모든 것을 완성할 학생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씨앗을 고르는 일이 순탄치 않았습니다. 대학의 존폐를 건 마지막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후기 대학이라면 설립 안 하겠다”


대학건설본부는 뜻밖의 사실을 마주했습니다. 문교부 방침에 따르면 신설대학은 개교 후 3년간 ‘후기’로만 학생을 모집해야 했습니다.


당시 대학들은 선발 시기에 따라 전기와 후기로 나뉘었습니다. ‘전기 대학’은 서울대를 비롯한 대부분의 상위권 대학이 포진해 있었고, 여기서 떨어진 학생들이 마지막으로 지원하는 곳이 ‘후기 대학’이었습니다. 그래서 후기 대학들은 우수학생을 뺏기지 않으려 전기 대학으로의 전환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고, 후기 모집이 된다는 것은 곧 전국 최고 수준의 학생들은 지원조차 하지 않는다는 뜻이었습니다. 국내 최초의 연구중심대학을 만들겠다는 꿈이 출발도 하기 전에 흔들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소식은 2차 교수 초빙을 위해 미국에 체류 중이던 김호길 학장에게 즉각 보고되었습니다. 그는 일정을 앞당겨 급히 귀국했습니다. 피로를 풀 겨를도 없이 문교부로 달려갔습니다.


박태준 설립이사장의 반응은 더 단호했습니다.


"후기가 되어 숫자 하나 더 보태는 평범한 대학이라면 설립 자체를 재검토하겠다."


전기 모집이 안 된다면 대학 설립을 중단할 수도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대학의 명운이 걸린 문제였습니다.


김호길 학장은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과학기술처 산하 과학기술대학이 특별법으로 지원받듯, 포항공대를 특차로 인정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문교부는 포항공대의 취지에는 공감했지만 즉답을 피했습니다. 방침 변경이 특혜 시비와 후기 대학들의 집단 반발을 부를 수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대신 한 가지 제안을 내놓았습니다.


"포항공대가 후기 모집 대학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국민적 공감대를 만들어 주십시오."


배수의 진이었습니다. 대학건설본부는 즉각 움직였습니다. '포항공대가 타 대학과 다른 점'과 '후기 대학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정리해 전방위 홍보에 나섰습니다. 문교부 출입기자 간담회, 건설현장 초청, 주요 일간지·TV·경제지·월간지·수험전문지, 심지어 옐로우 주간지까지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6개월 뒤인 1986년 9월, 문교부로부터 전기 모집 승인이 내려왔습니다. 배수의 진을 치고 나선 장장 6개월의 싸움이 마침내 끝났습니다.


대학건설현장을 배경으로 김호길 학장이 KBS ‘카메라 현장’ 팀과 인터뷰하고 있다. (1986년 6월 9일)



어느 대학도 감히 내걸 수 없던 약속들


전기 모집 승인을 받았다고 해서 문제가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방 소재 신설대학이라는 현실적 벽은 여전했습니다. 해답은 분명했습니다. 어느 대학도 흉내 낼 수 없는 지원제도를 만들고, 그것을 당사자들에게 직접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대학설립심의위원회의 승인을 받아 확정된 특별지원제도는 이러했습니다.


✔️ 학생 전원에게 퍼스널 컴퓨터와 어학교육 시설이 완비된 기숙사 제공

✔️ 학생 전원에게 장학혜택 부여

✔️ 우수학생 박사학위 취득 시까지 수학 보장

✔️ 졸업생 전원 취업 보장


지금 읽어도 파격적인 조건들이고 전례가 없는 약속이었습니다. 소수정예 연구중심대학을 반드시 성공시키겠다는 의지가 제도로 구현된 것이었습니다.


대학의 성격과 운영 방향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캐치프레이즈도 만들었습니다. '국내 최초의 연구중심대학', '교수 전원이 박사인 대학', '국내 정상만으로는 만족하지 않는 대학', '학비 걱정없이 학업에만 전념할 수 있는 대학'. 지금도 변함없이 포스텍의 특성을 잘 나타내는 말들입니다.


1986년 6월부터 학생·학부모·교사를 향한 초점 홍보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포항제철 직원 169명이 모교를 직접 방문했고, 과학고와 명문고 진학지도교사를 포항으로 초청했습니다. 전국 중·고교 학교장 연수회 2,500명을 포항으로 유치했고, 전국13개 주요 도시에서 설명회를 열어 2,097명을 만났습니다. 우수학생 1,764명을 캠퍼스로 초청했고, 7,878명의 가정으로 홍보물을 발송했습니다. 입시 바로 전날까지, 쉬지 않고 이어진 총력전이었습니다.


포항공대소식지에 실린 면학여건과 학생지원제도 광고 내용들 (1986년 8월호)



단 한 명만 와도 좋다


지원제도와 홍보전이 가동되는 동안, 또 하나의 논쟁이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지원 자격을 어디까지 제한할 것인가의 문제였습니다.


김호길 학장의 생각은 명확했습니다. 학력고사 상위 2.4% 이내의 학생을 선발한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전년도 서울대 공과대학 합격생 수준이었습니다. 연구중심대학이 조기에 자리 잡으려면, 그에 걸맞은 학생이 처음부터 와야 한다는 신념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학설립심의위원회 일부 위원, 포항제철 임원, 심지어 문교부까지 우려를 표명했습니다. 아무리 국제 수준의 시설을 갖췄다 해도, 지방 신설대학에 최상위권 학생이 올 것이라는 보장이 없었습니다. 자칫 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었습니다. 문교부는 한발 더 나아가 입학 자격 제한이 헌법상 평등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문제까지 제기했습니다.


모두가 고심하고 있을 때 박태준 설립이사장이 나섰습니다.


"한 명이 오면 한 명을 가르치면 되고, 한 명도 안 오면 올 때까지 연구소로 운영하면 된다. 이 때문에 교수 초빙이나 건축 공사가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법률자문 결과도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문교부의 우려도 잠잠해졌습니다. 상위 2.4% 이내라는 지원 자격이 최종 확정되었습니다.


훗날 김호길 학장은 뒤늦게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사실 상위 5% 이내 학생이면 어떻게 가르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원하는 인재로 키울 자신이 있었습니다." 개교 초기 대학의 명성과 위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2.4%라는 기준을 고집했던 것이었습니다.



한국 대학사(史)를 뒤흔든 이변


1986년 12월 3일, 포항공대는 역사적인 개교식을 가졌습니다. 4년제 대학으로는 국내 100번째, 연구중심대학으로는 첫 번째 대학이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퍼즐 하나가 남아 있었습니다. 1987년 1월 8일, 신입생 입학원서 접수가 마감되었고,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숫자를 확인했습니다.


입학원서 접수창구에서 김호길 학장이 지원자, 학부모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1987년 1월)


평균 경쟁률 2.2대 1. 9개 학과 249명 모집에 543명이 지원했습니다. 마지막 퍼즐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박태준 설립이사장은 포항제철 제1용광로에서 첫 쇳물이 흘러나오던 순간의 희열을 다시 한번 느꼈다고 했습니다. 김호길 학장은 교수, 직원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함께 만세를 불렀습니다.


합격자와 입시 결과는 1987년 1월 17일에 발표됐습니다. 340점 만점에 커트라인 296.3점, 합격자 평균 300.6점을 기록하여 성공적인 첫 입시를 치렀습니다. 합격자의 출신 지역도 서울·수도권 28%, 부산·경남 31%, 대구·경북 24%, 호남9%, 충청 6% 등 전국적으로 고른 분포를 보였으며, 전국 905개 인문계 고교 중 164개교에서 합격자가 나왔습니다. 개교 첫해부터 일약 전국 단위의 명문 대학으로 등장한 순간이었습니다.


한국일보 (1987년 1월 20일자 '지평선' 칼럼에서)

"적성은 내팽개쳐두고 눈치와 배짱으로 대학을 진학하거나 서울의 명문대만을 무조건 선호하던 진학풍조에 찬물을 끼얹는 이변이 지방의 한 신설대학에서 일어났다."

"지방의 신설대학이라 하더라도 우수한 교수진과 시설, 든든한 재단의 지원 등 대학운영에 꼭 필요한 여건을 구비하고 또 뚜렷한 특성을 내걸면 전통 있는 명문대학과 학생 유치 경쟁에서 당당히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점이다. 명실공히 한국의 MIT가 돼서 고급기술 두뇌를 길러내야 한다는 막중한 책무를 차질없이 실천에 옮겨야 한다."


동아일보 (1987년 1월 25일자 박태준 설립이사장 인터뷰에서 발췌)

"세계 정상의 인재를 길러내야 한다는 것이 포항공대의 목표이자 포항제철의 꿈입니다."

"학생모집에 일말의 불안감이 없지 않았지만 해외 석학들을 대거 유치하고 교육시설에 아낌없는 투자를 했는데 우수학생이 안 올 이유가 없다고 믿었습니다."


조선일보 (1987년 1월 27일자 사설에서)

"올해 갓 문을 연 포항공대 합격자의 평균 학력고사 점수가 300.6점이었다. 지원자가 전국에서 모여들었고 2.2대 1의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 포항공대가 창학 단계에서 이처럼 이목을 끌고 성공한 까닭은 치밀하게 설계하고 꾸민 이 학교의 특성화에 있고 그 내용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포항공대가 대학의 존재양식과 특성화 정책에 하나의 이정표를 제공하였다."


이로써 포스텍은 국제 수준의 교수진과 교육·연구시설, 그리고 우수학생이라는 연구중심대학의 세 박자를 모두 갖추고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1기 입학생 249명. 그들은 낯익고 평탄한 길을 마다하고,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소신으로 선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오기까지의 과정은 하나같이 이 대학이 처음부터 얼마나 치밀하게 설계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포스텍의 시작은 그렇게 완성되었습니다.


포항공과대학 제1회 입학식에서 신입생 대표가 선서를 하고 있다. (1987년 3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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